대구와 삼성, 그리고 이만수 |
[데일리안 스포츠 매거진] [데일리안 이상학 객원기자]“내 몸에는 파란 피가 흐른다”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에서만 58년째 몸담고 있는 토미 라소다의 명언이다. 하지만 파란 피가 흐르는 사람은 한국프로야구에도 있었다. 홈런을 치고 껑충껑충 뛰며 녹색 다이아몬드를 돌았던 ‘헐크’ 이만수(49)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의 몸에는 파란 피가 흐르지 않는다. 지금 현재는 그는 ‘스포테인먼트’를 주창하고 있는 SK의 빨간 유니폼을 입고 수석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대구의 얼굴, 이만수 이만수는 대구 토박이다. 대구중-대구상고를 졸업한 이만수는 한양대 시절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를 거치며 특급포수로 성장했고, 당당히 대구를 연고로 한 삼성의 파란 유니폼을 입었다. 이만수는 1982년 원년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와 1호 홈런을 터뜨리며 화려한 출발을 알렸다. 1982년 3월7일 MBC와의 개막전에서 5-2로 앞서던 5회, 타석에 들어선 이만수는 왼쪽 담장을 훌쩍 넘기는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홈런을 작렬시킨 뒤 포효했다. 헬멧을 벗고 주먹을 휘저으며 펄쩍펄쩍 뛰면서 환호했다. 이 같은 이만수식 홈런 세리머니는 1997년 9월27일 해태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마지막 252호 홈런을 때릴 때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홈런을 때릴 당시의 이만수는 프로야구 유일의 현역 원년멤버였다. 대구 시민들은 이만수를 자랑스러워했다. 한국프로야구에 길이 남을 슬러거였기 때문이었다. 1983년에는 홈런왕과 함께 MVP를 수상했고, 1984년에는 사상 첫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이룩함과 동시에 홈런왕 2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게다가 1983년부터 87년까지 5년 연속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으며 올스타로도 12차례나 뽑혔다. 프로야구가 막 출범한 상태에서 이만수가 쏘아 올린 호쾌한 홈런포와 독특한 세리머니는 야구 붐을 일으킨 요인 중 하나였다. 이만수가 전국적인 스타로 발돋움하자 대구 시민들의 그에 대한 애정도 더욱 커졌다. 하지만 실력 하나만으로 대구 시민들이 이만수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이만수의 야구에는 ‘희로애락’이 담겨져 있었다. 이만수의 홈런에는 기쁨이 있었고 이만수의 도루 저지 실패에는 노여움이 있었으며,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 실패에는 슬픔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어나 홈런을 치고 다이아몬드를 도는 이만수의 모습에서 대구 시민들은 즐거움을 느꼈다. 대구 시민들은 시멘트 콘크리트처럼 보잘 것 없는 대구구장을 연일 가득 메웠다. “만수야!”라고 목청껏 부르는 것만으로도 대구구장을 찾는 재미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야구가 그랬고 그 시절 이만수가 바로 대표적인 삼성 아이콘이었다. 애증의 삼성 이만수는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다. 1982년부터 1997년까지, 무려 16년간 삼성의 파란 유니폼만을 입었다. 1984년 일본 전지훈련 중 긴테쓰로부터 영입제의도 받았으나 대구와 삼성만 믿고 거절했다. 양준혁과 이승엽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삼성은 곧 이만수였고 이만수는 곧 삼성이었다. 이만수와 삼성은 한 마디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하지만 끝이 좋지 못했다. 둘 사이에는 사랑이 있었지만, 그만큼 미움도 도사리고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과거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현재를 잇는 것이 바로 과거다. 지금 이만수를 그리워하는 이들도 모두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만수와 삼성이 등을 돌린 건 1997시즌 이후. 이만수는 딱 마흔 살까지 선수생활을 하고 싶었다. 당시 나이 서른아홉. 일찌감치 은퇴를 했어야 할 나이였지만, 유일한 원년멤버로서 인생의 정오라는 불혹의 고지를 점령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시리즈 우승에 목말랐던 삼성 구단의 생각은 달랐다. 1군 엔트리 한 명이 시급한 마당에 노장을 넘어 퇴물이 되어버린 이만수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결국 이만수는 반 강제적으로 은퇴, 자비로 미국 연수를 떠났다. 삼성 구단은 코치 연수 지원을 놓고 이만수와 실랑이를 벌이다 그냥 그렇게 그를 떠나보냈다. 은퇴식은 애시 당초 기다하기 어려웠고, 대구 시민들은 분노했다. 하지만 이만수와 삼성이 극적으로 손잡을 기회도 있었다. 2003시즌을 마치고 삼성 구단은 초호화급 코칭스태프를 구성할 계획이었다. 기존 김응룡 감독에 선동렬을 수석코치, 한대화를 타격코치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만수를 배터리코치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이만수 역시 대구와 삼성으로 돌아간다는 마음에 설렌 나머지 서둘러 미국생활을 정리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불펜코치로 인정받았으나 사표를 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삼성 구단에서 일방적으로 ‘없었던 일’이라며 영입제의를 철회, 이만수의 생채기 난 가슴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이만수는 다시 화이트삭스로 복귀했지만 그 때 그 상처가 쉽게 아물리는 없다.
스포테인먼트 전령사 이만수는 지난해 9년간의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그에게 꽃다발을 건넨 곳은 파란색의 삼성이 아니라 빨간색의 SK였다. SK는 김성근 감독과 함께 수석코치로 이만수를 영입했다. SK는 제2의 창단을 선언하며 스포테인먼트를 전면에 내세웠고, 그 전령사로 이만수를 택했다. 현역 시절부터 이만수는 스포테인먼트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준 인물이었다. 미국에서도 ‘빅 스마일’로 통하며 선수와 직원 그리고 팬들과도 허물없이 지냈다. 폐쇄적인 한국프로야구의 풍조를 바꿔놓을 만한 인물은 이만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가을훈련 때부터 이만수는 SK의 팀 분위기를 바꾸는데 주력했다. 젊은 선수들에게 기를 불어넣었고, 베테랑 선수들에게는 격려를 마다하지 않았다. 지난해까지 음울한 기운을 냈던 SK 덕아웃은 올해 신예와 베테랑 가릴 것 없이 생기가 넘친다. 물론 팀 성적이 좋아진 것이 결정적 요인이겠지만, 그라운드 안팎에서 분위기 메이커 노릇을 해내고 있는 수석코치 이만수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이만수는 코치라는 직함에 갇혀있지 않고 야구장에서 관중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하기를 꺼려하지 않으며 응원단상에 올라가 응원을 주도하기도 한다. 지금껏 한국프로야구 코치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고, 이는 팬들에게도 신선하게 다가오고 있다. 게다가 그는 홈구장 문학구장이 만원이 되면 ‘속옷차림으로 그라운드를 돌겠다’는 대선언까지 했다. 프로야구 인기 회복을 위해 수석코치가 스스로 총대를 메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만수는 22일 자신의 고향 대구를 방문한다. 국내 야구에 복귀한 뒤, 공식적으로 처음 찾는 대구구장이다. 그러나 친정팀 삼성의 유일한 영구결번(22번)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영구결번 된 흔적은 대구구장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에게 환호했던 대구 시민들의 마음에 삼성의 22번은 오직 이만수뿐이다. 이만수는 10년만의 대구 방문에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를 그토록 기다리던 대구 시민들도 마찬가지. 비록 이만수가 입고 있는 유니폼은 파란색이 아닌 빨간색이지만 이만수를 향한 대구 시민들의 애정은 변함없다. 영원한 대구와 삼성의 영웅이자 프로야구의 부활을 위해 온몸을 다 바치고 있는 진정한 스포테인먼트의 전령사이기 때문이다. 데일리안 스포츠/ 이상학 객원기자 ================================================================================= 기사 원문 : http://sports.nate.com/Service/Sports/ShellView.asp?ArticleID=2007052213482964175&LinkID=249 |
대구 20대 이상의 시민 중...
'이만수'라는 이름을 모르는이가 있겠는가?
초등학교때는 모든이의 우상이였지 않는가....
이만수 = 삼성, 삼성 = 이만수.....
나역시 그가 삼성에 오기를 바란 사람들 중 하나였다.
흠.....오늘 경기장 가봐야겠다.
1회부터 보지는 못하더라도....
일끝나고 8회 쯤에라도 찾아가봐야겠다.
만수 형님(?)을 보고싶다~~~으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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